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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51 무스탕 전투기 김영환 장군 삼색기 205번 무스탕 하늘의 야생마

한국戰의 영웅 MUSTANG

 


눈에서 사라지더라도
가슴에서 잊히지 않는 각인(刻印)된 존재,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기,
F-51 무스탕이 그러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태극마크를 몸에 새기고
목숨을 내어 한반도를 누빈 ‘무스탕’.

한국 공군이
그리고 대한민국이
무스탕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유,
그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 공군전력 ‘0(제로)’ 상태에서 맞은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낯선 비행기가 여의도 상공을 덮친다. 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공군전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한국 공군에겐 전쟁에 임할 수 있는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었다. 오로지 연락· 정찰업무에 사용되는 경비행기 12대와 훈련기 10대, 총 ‘22대’가 공군전력의 전부였다. 전쟁 당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요청으로 미극동공군사령부는 전투기 10대를 한국에 긴급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기 ‘F-51 무스탕’이었다.

“비행장 안에 소총 하나가 제대로 없었어요. 보초를 서도 보초병이 실제 소총을 가지고 선 것이 아니고 목총 같은 것만 갖고 있었죠.”
최원문/무스탕 부대 정비사


■ ‘하늘의 야생馬’ 무스탕,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기가 되다

무스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상공에서 연합군 폭격기들을 호위하고, 독일 공군의 제트엔진 전투기 ‘메서슈미트 Me-262’를 격추하는 등 공중전에서도 크게 활약한 전투기였다. 이러한 무스탕이 한국 최초의 전투기가 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무스탕은 호락호락한 전투기가 아니었다. 7월 4일, 한국공군은 베테랑 조종사 한 명을 잃는다. 긴박한 전황에 훈련 없이 무스탕 출격을 감행한 것이 전사로 이어진 것이다. ‘야생마’라는 뜻을 가진 이름 그대로, 무스탕은 거칠고, 저돌적인 야생마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한국 공군은 야생마를 길들이듯, 무스탕을 길들이는 게 급선무였다.

“굉장히 무거워요. 무겁고, 말을 잘 안 듣고, 한번 속도 나면 잘 서지도 않고, 속도 내려면 잘 나오지도 않고, 일단 속도 나면 브레이크 밟아도 금방 서지 않고.”
권성근/ 무스탕 조종사

 


■ 무스탕에 의한 인연, ‘6146 부대’와 ‘딘 헤스’

전쟁 초 무스탕 전투기와 함께 작은 비정규부대가 한국으로 파견돼왔다. 미 제5공군에서 파견한 6146부대였다. 무스탕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공군에게 정비, 조종훈련, 보급 등 체계적인 공군 시스템을 전수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당시 전세가 불리하자, 6146부대의 고문단은 태극마크가 그려진 무스탕에 직접 올라타 출격에 나선다. 이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6146부대장 ‘딘 헤스’다. ‘신념의 조인’이라는 글귀를 자신의 전용 무스탕에 새기고, 1년 사이 ‘250회’라는 가공할만한 출격일수를 기록한 딘 헤스 중령. 6.25전쟁 발발 1년 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외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비행기가 착륙하고 내려서 주변을 바라보니 왠지 고향의 땅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처음 온 곳이었음에도 말입니다.”
딘 헤스/ 6146 부대장


■ 한국 공군의 단독출격, 무스탕이 늘 함께했다

전쟁 시작 1년, 무스탕이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한 지도 1년이 되었다. 6146 고문단과 동반출격하면서 키운 무스탕 조종 실력은 이제 고문관 없이 단독출격이 가능할 만큼 향상됐다. 무스탕 부대는 단독출격작전을 위한 전진기지로 강릉을 선택, 그곳에서 승호리 철교, 평양 대공습, 351고지 작전 등을 수행해나간다. 특히 미 공군도 성공하지 못 한 승호리 철교를 폭파시켜 한국 무스탕 부대의 위용을 보여주었고, 전술공군 작전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근접항공지원’ 작전을 351고지에서 성공적으로 이끌어 전술공군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 역사적인 순간순간에 무스탕이 늘 함께했다.
“지상에서 보면 아주 커 보이는데 위에서 보면 조금한 줄 하나 보이는 게 교량이라고. ‘미국 조종사들은 왜 밑으로 안 내려가느냐’ 하면 고사포, 이런 지상포 때문에 위험하니까 높은데서 그냥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몇 100쏘티를 가도 승호리 철교를 때리지 못했다고, 맞추지 못했다고.”
이명휘/ 무스탕 조종사


“(승호리 철교 폭파) 그게 성공해서, 잘했다고 휴가를 받았죠. 우리 공군에게 한 일주일인가 열흘인가 휴가를 줘서 다들 강릉에서 사천으로 와서 좀 쉬었다가 올라가고 그랬죠.”
김두만/ 무스탕 조종사

■ 6.25 전쟁의 영웅 ‘무스탕’,
            그가 기억하는 ‘빨간 마후라’

 

 

현재 한국엔 6.25전쟁을 기억하는 무스탕이 두 대 있다. 이들은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 조종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무스탕들이다. 그런데 이 두 기체 중 하나, 용산 전쟁기념관의 ‘205번 무스탕’이 조금 특별한 기체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205번 기체의 스피너 색은 적색이지만, 89년 전쟁기념관으로 이관되기 전 공군본부 앞에 전시돼 있을 때까지만 해도 스피너 색은 적색, 청색, 황색으로 이루어진 ‘삼색’이었다. 무스탕 조종사들은 말한다. ‘삼색기는 3개 대대를 통솔하는 비행단장의 기체로, 한국 공군 내에 단 한 대밖에 없었다’고. 유일한 ‘삼색기’였던 205번 무스탕은 과연 누구의 기체였을까? 6.25 전쟁의 영웅 ‘무스탕’은 침묵을 지켰지만, ‘빨간 마후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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