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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광개토대왕 거란정벌 경제적 이득 미천왕 시신 도굴 정복군주 애민군주 광개토대왕

 

오늘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만주벌판과 요동, 쏭화강,시베리아, 한강까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확장해 대제국의 기틀을 만들어 놓은

광개토대황에 모든 것을 알아본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당시 고구려는 아주 좋지 않은 사회적 배경이였다.

과연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이 꿈꾸던 고구려는 어떤 모습이였을까?


■ 위기의 고구려, 새로운 왕을 맞이하다.
“가뭄에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삼국사기 中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은 391년 즉위를 했다. 당시 고구려는 큰 혼란에 계속되더니 시기였다.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50년전 북방의 강국인 연나라의 계속적인 핌략으로 고구려 백성 5만명을 포로로 삼았던 것이다.
연나라는 광개토대왕의 증조부인 미천왕의 시신을 도굴해 인질로 삼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여기에서 그친것이 아니라 백제의 압박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백제와 전투를 하던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를 하는 등

반 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많은 수모를 당했다.

계속되는 적들의 침략가 기근으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까지 발생을 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18세의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른다.

■ 오랜 숙적 백제, 마침내 무릎을 꿇다.

왕위에 오늘 22년 동안 많은 정복활동을 펼친 광개토대왕.

잦은 전쟁에도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광개토대왕이 관심이 있던 땅은 거란의 시라무렌 강과 요하강 동쪽,요동 등 단순하게

영토를 넓혀가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이로운 땅을 정벌했다.

 

 

정복활동에 가려져 경영군주로써의 면모가 주목받지 못한 광개토대왕.

■ 광개토대왕이 꿈꾸던 세상 영락‘永樂’
광개토대왕 사후, 아들 장수왕은 위기의 고구려를 대제국으로 만든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능비를 세운다. 높이 약 6.39m, 너비 2m의 거대한 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업적과 유언이 세 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비석에 새겨진 광개토대왕의 이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이것에 광개토대왕이 바랐던 새로운 고구려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데... 국가적 위기를 타파하고, 고구려다운 고구려를 재건해낸 왕 광개토대왕. 과연, 그가 꿈꿨던 고구려는 어떤 모습일까?


 정복군주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애민군주 광개토대왕의 그날들을 재조명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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