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송

역사저널 그날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금서된 이유 문체반정 정조 박지원

 역사저널 그날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금서된 이유

문체반정 정조 박지원

 

 

오늘 그날에서는 조선 후기 최고의 문장가였던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

방송을 합니다.

박지원은 18세기 조선에 새로운 변혁의 바람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합니다.

북학사상의 리더였던 연암 박지원.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였을까요?

조선시대 노론 명문가 출신에 뛰어난 문장가 였던 그는 왜 사회의

아웃사디더를 자처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분입니다.

과연 그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한번 보겠습니다.

박지원은 영조 46년에 열린 1차 소과시럼에서 장원을 차질 할 만큼

소문난 인재였다고 합니다.

 

 

시험에서 박지원으 답안을 본 영조는 친히 침전으로 불러서 아낌없이

격려를 할 정도로 앞날이 창창한 인재였습니다.

이렇게 총명한 인재가 2차 시험에서는 답을 쓰지 않고 백지를 제출하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더군다나 백지를 제출하고 나서는 더이상 과거시럼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세가 보장된 과거시험. 누구나 선비로써 한번씩은 꿈을 꾸었던 시험을

포기하만 박지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박지원은 작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양반전, 허생전 등을 직필한 박지원은 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박지원이 직필한 대표작중 하나인 "열하일기". 이글은 박지원이 44세때 청나라를

갔다와서 기행문으로 완본이 출간 되기도 전에 9종의 필사본이 돌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글이라고 합니다.

 

 

그러던중 1792년 정조는 사회가 어지렵고 혼란스러운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를 말하며 그 근원지가 바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였다고

지목을 하게 됩니다.

조선시대의 최고의 인기였던 "열하일기"가 금서가 되버린 이유입니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열하일기"를 좋아 했던 이유가 무엇이였을까요?

왜 정조는 이 책이 문제가 있다고 했던 것일까요?

열하일기에서는 박지원은 청나라의 실상을 전해주고 "이것"이야 말로 청나라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을 했는데 과연 열하일기에는 청나라의 진수라고

한것이 무엇이였을까요?

박지원은 과거를 포기하고 출세를 거부를 했지만 친구의 부탁으로 50세라는 많은

나이에 종9품 관직생활을 시작을 했습니다.

 

 

박지원이 늦은 나이에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은 어려운 집안 삶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청나라에서 보고 온 것들을 실험해 보고 싶어서 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러 관직에 있으면서 생활에 필요한 수레나 벽돌굽기, 물레방아 등의

도구들을 청나라식으로 직접 만들었습니다.

대부분 많은 관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였지만 박지원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용후생의 사상을 직접 실천을 한 분입니다.

 

그런 모습의 박지원을 본 정조는 크게 감탄을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체반정으로 시작된 정조와 박지원의 인연 과연?

개혁의 바람이 심하게 불던 18세기 조선시대 뿐만아니라 전 세계는 어떤 상황이였는디

이원복 교수에 이야기를 들어 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최대의 문장가이자 실학자 박지원!!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요?

오늘 방송에서 함께 해볼께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