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큐 3일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최대 수제화 유통 단지였던 염천교 일대 수제화
거리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는 장인들을 만나 보았다.
이곳에는 아직도 한 사람 한 사람 발에 딱 맞는 구두를 만들고 있는 경력 30년
베테랑 구두 장인 들이 있는 곳이다.
■ ‘최초’를 만나다
염쳔교는 서울역에서 중림동 쪽으로 건너가는 고가다리다.
그 다리 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화 거리가 있다. 비싼 가죽을 구할 수 없던 시기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군화 가죽을 이용해서 구두를 만들어 팔면서 시작이 된
수제화거리다.
1980년 대에는 전국의 수제화 물량을 염천교 제화상가에서 공급을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였다. 지금도 구두매장 25곳과 공장이 50여개
공장과 함께 운영하는매장이 25여개 구두 부자재상이 30여개로 약 130개정도가
옛날에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값싼 중국산 신방이 수입되면서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없어졌지만 평생 자신의 일이라 생각을 하고 기술을 포지하지 못한 구두장이
들이 툭탁툭탁 천만 번의 망치질로 삶을 잇는 곳이다.
사장들도 일하는 사람들도 거의 60대 다 넘어요
그 사람들 만약에 구두일로 손 놔서 없잖아? 다음 50대, 40대 이어 받을 사람이 없잖아 그러니까 끝이지.
우리 때만 하더라도 이것만 배워 놓으면 밥 먹고 살 수 있다고 해서
너도 나도 배웠지만 지금은 없지
조성환_61
■ 평생을 짊어진 단 하나의 기술
최초의 구두거리답게 현재 수제화 생산 라인에서 활동 중인 장인들의 평균 나이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이다. 기본 경력만 30년 이상인 장인들, 전국으로 팔려나가던 수제화의 값어치는 값싼 중국산의 수입 덕에 턱없이 하락했지만 아직도 ‘내 구두’에 대한 자부심은 잃지 않았다. 젊은 시절 돈을 벌어보겠다는 일념 하에 구두 만드는 기술만 가지고 아무 연고도 없는 칠레, 브라질에서 소금밥만으로 버텼다는 김정무 씨에게 구두는 자식들을 키워내게 도와준 소중한 기술이다. 비단 나이가 들어도 나의 일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건 김정무 씨만이 아니다. 올해부터 20년을 더 활동해 100세 구두 장인으로 TV에 출연하는 게 목표라며 웃는 박상식 씨 등 현재 수제화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익장들의 빛나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전철에서도 보고 버스에서도 보고 길에서도 보고 저게 우리 신발이구나, 그걸 좀 느끼는 거죠 그게 참 재밌거든, 기쁩니다, 그게 진짜 좋아 김종삼_62
많지도 않고 우리가 소규모긴 하지만 스무 명, 매장까지 서른 명 되는데
그 직원들이 있는데 내 목숨과도 같죠
■ 천 번의 손길이 닿은 구두
구두를 시작하면서 눈에 보이는 ‘성공’의 최고의 목표치를 정한다면 나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내는 것. 전주에서 올라와 구두 브랜드를 만든 충우 씨는 이정도면 성공한 인생이라며 웃는다. 자신만의 확실한 구두 철학을 가진 김충우 씨는 구두의 기초를 하려면 3~4년을, 기본을 하려면 5~6년을, 구두를 온전히 자기 힘으로 만들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린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10년이 지난 후 ‘구두는 무엇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구두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가 판가름 나는 터닝 포인트라는데...
공장을 운영하면서 ‘구두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김충우 씨는 내 이름을 건 구두가 더 완벽한 모습을 갖출 때까지 밤늦도록 남아서 서툰 부분을 찾는다. 나의 밥벌이뿐 아니라 매장 직원까지, 서른 명의 사람들의 밥벌이가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한시도 쉴 수 없다. 매일 밤 완성된 구두를 들고 매장에 들려 제품 배치부터 손님 응대, 매장 직원 미팅까지 빼먹지 않고 챙기는 충우 씨의 하루가 바쁘다.
구두요, 딱 집어 말하자면, 내 목숨과도 같은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렇다고 봐야겠죠, 나 혼자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우리 전 직원 있잖아요
김충우_57